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라즘 왕조 (문단 편집) === 아누쉬테긴 왕조 === 1077년, 셀주크 술탄 [[말리크샤 1세]]의 직속 굴람이었던 '''아누쉬테긴 가르차이'''가 호라즘 샤로 임명되었다. 아누쉬테긴이 언제까지 통치했고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1097년, 말리크샤 1세의 후임 술탄인 [[바르키야루크]]가 보낸 총독이 바로 죽자 아누쉬테긴의 아들 '''무함마드 1세'''(1097 ~ 1127)가 후임 호라즘샤로 인정되었다. 그러므로 보통 아누쉬테긴이 임명된 1077년을 (아누쉬테긴 계열) 호라즘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무함마드 1세는 1127년까지 살았으며, 재위 기간 내내 셀주크 제국의 속국 상태를 유지했다. 무함마드 1세의 아들인 '''아트시즈'''(1127 ~ 1156) 역시 부왕과 마찬가지로 처음 10여 년 동안은 셀주크 제국에 순종했으나, 그 뒤에는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1138년 아트시즈는 군대를 일으켜 [[호라산]]을 약탈했으나, 셀주크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가 [[호라즘]]으로 쳐들어오자 그대로 도주했다. 산자르가 돌아가자 아트시즈는 곧 돌아와 새 총독을 죽였고, 산자르에게 다시 복종하기로 합의했다. 1141년, 산자르가 '''[[카트완 전투]]'''에서 [[야율대석]]이 이끄는 [[서요]] 군대에게 패배하자 아트시즈는 그 틈을 타 다시 호라산 지역을 공격했다. 그러나 아트시즈는 산자르의 반격을 받아 호라산에서 쫓겨났고, 카라 키타이 군대가 호라즘까지 쳐들어오자 막아내지 못하고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때부터 호라즘 샤는 셀주크 왕조와 서요 왕조에 이중으로 복속되었으며, 카라 키타이에게는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1153년 아흐마드 산자르가 [[오우즈]] 반란군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히자 아트시즈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며 호라산을 넘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1156년에 사망했다. 아트시즈의 아들 '''일 아르슬란'''(1156 ~ 1172)은 부왕에 비해 운이 꽤 좋은 편이었다. 그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산자르가 사망했고, 약해져 있던 셀주크 제국은 산산이 분열되어 더이상 호라즘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이를 기회 삼아 일 아르슬란은 호라산의 오우즈 반란군이나 트란스옥시아나의 카라한 왕조 잔당 등을 상대로 영토 확장을 꾀했지만 뾰족한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한편 셀주크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서요에게는 계속 연공을 바쳤는데, 말년에 연공을 제대로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쳐들어온 서요의 군대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던 중 병사했다. 그의 치세부터 호라즘은 실질적인 독립 왕국이 되었는데, 서요에 대한 복속은 계속되었지만 연공 납부 이외의 내정 간섭은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아누쉬테긴계 호라즘 샤 왕조의 영토는 호라즘 지역에 한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